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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의 기도

설교본문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3: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2018년 09월 02일 [3부]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시 3:1~8) | 김현길목사


‘오직 예수만 바라봅시다.’
[서론] 담임목사님께서는 미주지역 전도집회에 참석하신 후 현재는 중남미 전도집회 중에 계시며 북미주 산업인대회에 참석하신 후 귀국하십니다. 남은 사역 일정과 건강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AD 500-1,500년경까지 1,000년의 시대를 중세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대를 암흑시대라고도 합니다. 왜 암흑시대일까요? 성경을 소유할 수도 없었고,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의 유럽의 모든 사람은 국교가 가톨릭이었기에 모두 신자였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방침 탓에 일반인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성경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신부 혹은 귀족 외에는 성경을 소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성경 한 권의 값은 그 당시 돈으로 약 8,000만 원 정도였기에 일반인들은 살 수도 없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알고자 하는 성도들이 성경을 읽게 해달라고 교회에 청원했지만 묵살 당했습니다. 이유는 연옥설을 교육하고 면죄부를 판매하던 가톨릭 교회의 비성경적 관행 때문입니다.

이때 독일의 무명 수도사 마르틴 루터(1483-1546)가 그의 나이 34세 때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의 정문에 95개 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종교 개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핍박을 가하자 루터는 핍박을 피해 성으로 들어가 라틴어 성경을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이룬 최대 업적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일반 성도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유럽의 인쇄술이 발달하였고 이로 인해 번역된 성경이 인쇄되어 평신도에게 은밀하게 공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 마음속에 ‘말씀의 장작’이 쌓이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장작이 쌓인 그곳에 종교 개혁자들이 ‘불씨’를 떨어뜨린 순간 유럽에 종교 개혁이 평신도를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종교 개혁을 통해 순교의 피를 흘렸던 유럽의 현재 기독교인의 수는 총인구의 2~3%밖에 안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 교육입니다. 말씀 교육입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4:13)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평신도들이 읽어야 합니다. 읽을 때 그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말씀의 장작’이 되어 쌓이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오면 기도합니까?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 질병의 문제가 오면 기도하십니까? 성도들 마음속에 기도의 장작이 쌓여 있지 않으면 문제가 왔을 때 사람 의지하고 술 의지하고, 더 심해지면 중단이 찾아옵니다. 예배가 중단되고, 사역이 중단되면 아담처럼 숨어 버리게 됩니다. 사역하면서 실패와 고통, 문제 속에서 방황하는 성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스스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죽고 싶다’,‘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라고 고백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인간성 상실 직전의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만 주시겠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낄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율법에도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태형을 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때리는 것이 아니라 40대까지만 때리라는 것입니다. 더 때리면 사람이 죽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를 보면 40대가 넘을 것 같은 고난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진짜 안타까운 것은 문제가 왔는데, 그 문제를 이길만한 말씀의 장작이 그 심령에 없다는 것입니다. 평상시 말씀과 기도의 장작이 쌓여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중단’이 옵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시편 3편은 이런 고통과 좌절 속에서 회복하여 다시 일어나는 다윗의 체험적인 시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체적 내용은 열왕기상 15장~19장에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본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심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아울러 이스라엘 민심이 다윗에게서 완전히 떠나버립니다.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삼하15:12-13) 왕은 왕인데 민심이 떠나버린 왕입니다. 다윗은 현재 민심을 잃고 배신의 아픔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고통이요, 아픔이요 가정의 수치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믿고 따르던 충신 아히도벨이 오히려 대항하는 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키웠던 장군입니다. 동고동락 했던 장군입니다. 그런데 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다 무너진 상태입니다. 아파하거나 고민할 여유도 다윗에게는 없습니다. 이제는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삼하15:14) 두려움과 고민까지도 사치가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이제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단계입니다. 그럼 다윗이 어떻게 이런 극한 죽음의 고통 속에서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도 어떻게 하면 문제 속에서 진정한 감사가 회복될 수 있을까요? 말씀을 통해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1. 나의 방패요 영광이신 여호와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시3:1-2)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의 비참한 상황과 아픔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의 주동자가 되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합니다.
2) 다윗의 충신이요 모사인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하나 되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3)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민심이 압살롬에게 넘어간 상태입니다.
그 주변에 그를 조롱하는 자, 비웃는 자, 대적하는 자, 그를 치는 자들이 다윗을 보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왕이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하였습니다. 민심을 잃은 채 도망가고 있습니다. 절망감, 배신감, 수치심, 그 속에서 오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피해서 동산 나무에 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동산 나무에 숨은 아담을 몰라서 아담을 부르셨겠습니까? 아담의 영적 위치를 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네가 전에는 나와 교제했고, 나만 바라보고, 나만 의지했는데, 네가 사단의 말을 듣고 나를 떠났구나! 너의 영혼의 위치는 어디 있느냐?”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 영이 죽어버린 아담은 “하나님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문제인데, 아담은 벗은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불신앙한 것이 문제인데, 아담은 벗은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전에도 벗었지만 아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벗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후 ‘벗은 것’이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오로지 자기 육체만, 자기의 문제만, 자기의 부끄러움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동일하게 다윗도 절망과 고통 속에서 오로지 대적에게만 주목합니다. 나를 죽이려고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과 아히도벨, 그리고 그를 따르는 대적만 보입니다. 문제가 다윗을 ‘결박’시켜 버렸습니다. 다윗에게는 평생 수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런 고통이 처음이 아닙니다. 사울이 20년 동안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해서 도망자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수많은 전쟁 속에서 고통과 배반, 배고픔에 익숙해진 도망자 신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현실 앞에서 자기의 대적이 많고, 원수가 많고, 문제가 많고, 환경이 최악이라고 인정하고 아파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얘기와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고백입니다. 어려움과 문제가 나의 영적 눈과 귀를 닫아 버립니다. 오로지 문제만 보입니다. 그 문제를 준 대상을 공격합니다. 부모가 문제와 아픔을 주었습니까? 부모를 공격합니다. 남편이 문제를 주었습니까? 남편을 공격합니다. 그러면서 나의 문제에 스스로 결박되어 버립니다. 말씀이 나를 이끌고, 강단이 나를 이끌어야 하는데, 문제가 나를 이끌고, 사건과 사고가 나를 이끌어 가 버립니다. 결국, 그 문제가 정신, 영혼, 마음을 잡아 버렸습니다. 그것을 결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회복되고 극복했을까요? 이 말은 깊은 외로움을 겪고 있는 나, 문제와 사건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나, ‘정말 가정을 계속 끌고 가야 하는가? 이혼해야 하는가?’라고 고민하고 있을 때, 대학과 취업 속에서 절망 속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질병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자포자기하고 싶을 정도로 깊은 영적 수렁에 빠져있을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어떻게 영적인 흑암 속에서 회복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평상시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 기도가 쌓였던 다윗이 문제 앞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하나님이여!’, 매 절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1절에 ‘여호와여’, 2절에 ‘하나님께’ 3절 ‘여호와여’, 4절에 ‘여호와께’ 5절에 ‘여호와께서’ 7절에 ‘여호와여’,‘나의 하나님이여’ ,8절에 ‘여호와께’) 다윗은 1절~2절에서 ‘내 삶이 어렵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내 주위에 원수와 대적이 있습니다. 내 아들이 나를 반역하고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머물러있지 않고, 큰 체험을 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니 큰 기적과 응답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3절에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본인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가 나의 방패였고, 나의 영광이었고, 나의 머리를 들게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즉 ‘원래의 영광’을 되찾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4절에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어떻게 기도했다는 것입니까?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나의 생각, 나의 정신, 나의 영혼을 한 곳에 집중하는 기도입니다. 즉 나의 체중을 실어서 하는 기도입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4) 묵상기도와는 전혀 다른 기도입니다. 부르짖는 기도 속에는 나의 간절함이 있습니다. 목마름이 있습니다.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이 아니면 나의 대적과 나의 원수들을 꺾을 수 없습니다. 간절함 속에 나의 체중이 실린 기도입니다. 이것이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본문 7-8절에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언제 여호와께서 일어나서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시겠습니까?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일어나십니다. 사단은 문제 속에서 고민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고,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고, 술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것을 ‘영적 침묵’이라고 합니다. 영적 침묵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여호와께서 일어나서 우리의 문제에 개입하십니다. 간섭하십니다. 긍휼히 여기십니다.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까? 마6:9-1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분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가 행2:21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자녀의 특권은 위기 속에서, 절망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문제 속에서 어려움 속에서, 근심 속에서, 흑암 속에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약속을 잡고 부르짖는 기도에 도전한다면 다윗이 받은 응답과 체험이 사실적으로 임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사실적으로 받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3:5-6) 다윗은 지금 대적자 천만인과 하나님 한 분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이 나의 대적 천만인을 막아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때 찾아오는 것이 ‘평안’입니다. 다윗의 주변에 수많은 대적들, 그는 ‘천만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적뿐만 아니라 조롱하는 사람들, 시비 거는 사람들, 그리고 압살롬을 피해 도망치는 상황입니다. 쫓기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5절에 ‘누워 자고 깨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극심한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죽음과 같은 상황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마음의 갈등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무서운 생각, 추한 생각, 허망한 생각, 절망적인 생각에 잡히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합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일어나서’ 다윗에게 평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대적이 무서웠고, 원수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도 나는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백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25시의 응답’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평안하기 때문에 ‘편안히 누워 자고 깬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믿음이 무엇입니까? 5절에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라” 그래서 최고의 기도 응답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이 나를 지배할 때 평안이 선물처럼 따라옵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히7:2) 장차 오실 그리스도는 의의 왕이요, 살렘 왕 곧 평강의 왕입니다. 즉 평강을 지배하는 왕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다윗에게 이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때 오는 것이 평안입니다. 평안의 결과는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무서운 생각, 허망한 생각, 추한 생각, 절망적인 생각 속에 새벽 직전까지 고민하다가 그때 잡니다. 이것을 사망의 잠, 흑암의 잠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묶인 상태요 결박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침묵의 영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문제 속에서 침묵하게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 침묵하게 합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못 부르게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데,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결박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이 침묵의 영, 사단에게 결박되어진 상태입니다.

그가 언제 승리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언제 모세에게 하나님은 역사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게 하셨습니다. 지팡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의 손에 잡혔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세의 손에 잡힌 지팡이만 쓰임 받았습니다. 물질이 누구 손에 잡혔을 때 쓰임 받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잡혔을 때, 돈의 위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린 다윗에게는 작은 돌밖에 없습니다. 작고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다윗에게 잡힌 순간, 나라를 구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매일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초라함이 영광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결론] 보통 새들이 알을 낳을 때 6~10개를 낳습니다. 이 중에 부화 되는 것은 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영양실조로 죽는다고 합니다. 누가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요? 어미 새가 먹이를 가지고 왔을 때 입을 작게 벌리는 새끼에게는 먹이를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입을 크게 벌리는 새끼 새들만 먹이를 받아먹고 살아남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과 욕망 앞에서는 입을 작게 열고 살아도 되지만 ‘기도할 때는 입을 크게 열어야’ 합니다. 21세기 사단의 공격은 문제 속에서 침묵하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침묵의 영에 사로잡혀 문제만 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윗처럼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주신 방패의 응답, 영광의 응답, 회복의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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